먹는 것을 넘어 감탄하게 만드는 직업이 있다. 오늘은 '음식 조각가 – 칼끝에서 피어나는 식재료의 예술'에 대해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채소와 과일에 혼을 새기는 사람
“칼 하나면 모든 재료가 살아나요. 무가 국물 재료로만 쓰이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푸드 카빙(Food Carving). 말 그대로 음식에 조각을 새기는 예술이다. 수박에 섬세한 꽃무늬를 조각하고, 당근을 잎사귀 모양으로 다듬고, 무로 백호를 새기는 작업. 나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연회장 전속 음식 조각가 김도형(가명) 씨를 만났다.
그가 처음 보여준 것은 무로 만든 연꽃이었다. 부드럽게 퍼지는 꽃잎 하나하나가 고운 결을 품고 있었고, 가운데는 얇게 깎은 당근으로 수술을 표현했다.
“이거 하나 만드는데 1시간 반 걸렸어요. 무가 너무 잘 부서져서 칼의 각도, 압력, 공기 습도까지 다 고려해야 하죠.”
음식 조각가는 단지 보기 좋게 음식 플레이팅을 꾸미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식재료라는 살아 있는 캔버스 위에 미술을 새기는 사람이다. 게다가 조각한 작품은 반드시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푸드 카빙은 아시아권, 특히 태국과 한국에서 오래된 전통을 이어온 예술이다. 조선시대 궁중 연회에서도 수박과 배, 단호박 등에 조각을 새겨 장식했고, 현대 호텔이나 한식당에서는 고급 연회와 행사에서 여전히 이 기술이 쓰이고 있다.
먹는 예술, 사라지는 손맛
김 씨는 요즘 이 일을 ‘사라질 위기의 손기술’이라 표현했다.
“예전엔 호텔 조리사라면 누구나 간단한 카빙 정도는 했어요. 요즘은 사진 한 장, 영상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음식 조각은 사진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결’과 ‘기운’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에게 푸드 카빙은 단지 시각적인 장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음식에 대한 존중이다.
그는 연회장, 전시회, VIP 만찬, 국가 행사 등 다양한 곳에서 작업해왔다. 어떤 날은 하루에 15kg짜리 수박을 5개 조각해야 했고, 또 어떤 날은 한복 입은 인물을 무로 새겨달라는 특수 주문도 받았다.
“한 번은 외국 VIP가 방한했는데, 한식 코스 요리 사이사이에 한국 전통 문양이 들어간 채소 조각을 넣었어요. 그 분이 감동해서 고맙다는 편지를 따로 보내셨죠.”
그는 작업 중 가장 두려운 건 칼을 대는 순간의 실수라고 했다.
“작품은 한 번의 칼질로 갈려요. 한 꽃잎이 찢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칼끝에 모든 감각을 실어야 하죠.”
칼 하나로 길을 만든 장인
김도형 씨는 원래 한식 조리사 출신이었다. 조리사로 일하던 중, 호텔 선배에게 푸드 카빙을 배웠고 그 섬세함과 매력에 빠져 전문적으로 파고들었다. 이후 국내외 대회에서 입상했고, 현재는 푸드 카빙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제자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칼 하나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그 칼로 직업도 만들고, 삶도 새기고 있죠.”
하지만 여전히 음식 조각가는 희귀 직업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첫째, 배우기가 어렵고 연습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둘째, 수요가 많지 않아 생계로 이어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실 전업 음식 조각가는 전국에 10명도 안 될 거예요. 대부분은 조리사 겸업이죠. 예술과 직업 사이에서 늘 고민이 많아요.”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푸드 카빙을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전통적 미감과 장인의 정성을 담은 문화적 콘텐츠로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부조각이나 나전칠기처럼 섬세한 전통이 있어요. 저는 채소와 과일을 가지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거예요.”
그는 마지막으로 수박을 천천히 돌리며 꽃무늬를 새기기 시작했다. 칼끝에서 형체 없는 곡선이 피어오르고, 단단한 껍질이 조용히 모양을 드러냈다. 마치 한 그릇의 요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음식 조각가는 칼로 꽃을 피우고, 채소에 숨을 불어넣는 예술가다. 그들은 먹는다는 행위를 단순한 생존이 아닌, 감탄과 감동으로 바꾼다. 사라질 뻔한 기술이지만, 그 손끝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조각들이 있다. 맛보다 먼저 감동을 전하는 직업, 푸드 카빙 아티스트. 그들은 식탁 위의 조용한 미술가들이다.